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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웹워쓰 올드렉토리 존 웨슬리의 고향 영국 링컨주에 있는 ‘웹워쓰’는 마치 마을 전체가 존 웨슬리의 박물관인양 이곳저곳에 그와 관련된 유적과 내용을 담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영문으로 'Epworth'라고 쓰는 이 지명이 소리 내서 읽으면 읽을수록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왤까? 초기한국감리교회사에 종종 등장하는 발음하기도 뻑뻑한 '엡웟청년회'때문이었을까. 선교사들의 권유로 탄생한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 현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회)의 ‘엡웟’(Epworth)은 존 웨슬리의 출생지인 바로 이곳의 지명을 딴 것이 맞다. 그 뜻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남"이라하니 청년회의 이름으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엡워쓰에는 존 웨슬리의 생가이며, 아버지인 사무엘이 죽던 1735년까지 가족들이 살았던 올드 랙토리(Old Rectory)로.. 2010. 5. 6.
[터키] Berr Hotel Istanbul Welcome to Your Home in Istanbul Old City Founded in 1990, Berr Hotel-Istanbul has gone through a big renovation process since July 2001 after the owner company Koseoglu Turistik Tesisleri Saglik Hizmetleri ve Insaat Tic. A.S.'s takeover of the hotel's management. Berr Hotel-Istanbul has 102 Rooms in total which are all equipped with key card system, manually controlled A/C, telephone, minibar, .. 2010. 5. 6.
[터키] The Hotel Coast Light Kusadasi The province's capital, called Aydin, enjoys a widespreact reputation for its fine figs. Known as Tralleis in ancient times, it was at the center of a celebrated sculpture school. The remains seen today date from the second century A.D. After 1186 the town came under Seljuk rule, and the local museum displays artifacts from the different periods of its history.Back along the coast, Kusadasi, or.. 2010. 5. 6.
[그리스] Emmantina Hotel Glyfada The recently renovated 'A' class Emmantina HOTEL is situated in the fashionable beach resort of Glyfada, often referred to as the "Athenian Riviera", only 15 kilometers from the heart of the city of Athens. Our excellent location allows our guests to commute easily to unique archaeological sites, historical buildings, museums and cathedrals. The beach is only 200 meters away. Glyfada Square, wit.. 2010. 5. 6.
[그리스] Hotel Antoniadis Kalambaka  Welcome to Kalambaka - Meteora! Antoniadis Hotel is inviting you to Kalambaka, an area famous for the impressive giant towering rocks of Meteora and the long religious tradition of the monasteries located there. We are expecting you to Hotel Antoniadis in Kalambaka, to offer you first class hospitality services, in a pleasant environment with all modern amenities Accommodation New 98 room hote.. 2010. 5. 6.
[영국] 옥스포드 웨슬리센터 이곳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여행이 가능했을까. 옥스퍼드에서 웨슬리를 기념하기 위한 방을 마련한 링컨칼리지를 제외하곤, 방문지 한쪽 구석에 걸려있는 자그마한 안내팻말만이 그가 이곳에 존재했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유일한 표식이었다. 이 자그마한 흔적을 준비한 손길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웨슬리의 유산은 추억의 뒤안길로 이미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웨슬리 센터(Wesely Centre), 영국전역에 흩어져 있던 웨슬리와 관련된 문서는 물론, 감리교에 대한 온갖 중요문서와 희귀자료를 수집해 활발히 연구를 펼치고 있는 곳이다. 특히 이 연구소가 소중한 것은 매년 업데이트 된 감리교유산(Methodist Heritage)을 소개하는 책자를 펴내 웨슬리가 남긴 유산을 지키고 알리는데 한 몫을 제대로 감당하고 .. 2010. 5. 3.
[영국] 옥스포드 세인트매리교회 존 웨슬리의 흔적을 좆아 정신없이 다니다보니 하늘 한편에 노을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종착지로 선택한 곳은 세인트매리교회(St. Mary the Virgin). 옥스퍼드를 한눈에 담아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가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교회는 웨슬리가 설교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교회로 들어서는 입구 윗쪽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이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서있다. 교회 문을 닫는 시간은 오후5시였지만,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30분 전까지 신청을 해야했기에 기념품 상점으로 향했다. 상점 한쪽 구석에 있는 전망대 가는 길, 윤기를 내고 있는 8백년 된 돌계단은 나선형의 원을 그리며 컴컴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매듭진 밧줄을 붙잡고, 한사람만 허락하는 좁다란 127개의 돌계.. 2010. 5. 3.
[영국] 옥스포드 링컨칼리지 옥스퍼드에서 존 웨슬리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곳이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라면, 링컨칼리지는 그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더 깊은 학문적 연구와 성숙한 신앙으로 몰입해 들어갔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톰타워(크라이스트처치칼리지 정문) 우측 첫 사거리에서 하이스트리트로 한 블록 올라가다 골목길로 접어들면 나타나는 링컨칼리지. 언뜻 보기에 크라이스트처치의 1/5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박한 규모의 대학이지만 작다고 무시할 수 없는, 감리교인인 우리에게는 의미 깊은 곳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장차 감리교라는 거목으로 세워질 메도디스트 운동의 씨앗을 품었던 ‘홀리클럽=신성회’(Holy Club)가 모였었기 때문이다. 링컨칼리지 사무실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존 웨슬리의 연구실로 안내할 사람을 찾았지만, 열쇠맡은 이가 .. 2010. 5. 3.
[영국] 옥스포드 크라이스트처치 '메이드 인 옥스퍼드(made in Oxford)', 지난 2백여 년간 배출한 영국 수상만 열여섯 명에 이른다. 낮은 분지에 세워졌지만 ‘옥스퍼드로 올라갔다’는 표현이 자연스레 통용되는 전통과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곳, 옥스퍼드에 들어섰다. 사진에서나 보았던 높고 낮은 첨탑의 위용을 자랑하는 고딕양식 건물 사이 골목길, 관광객들의 여유로운 걸음과는 대조적으로 잰걸음으로 강의실로 이동하는 범상치 않아 뵈는 학생들, 대로를 가득 메운 차량과 자전거, 오랜 세월동안 하나하나 들어선 예술품 같은 건물들의 무계획(?)한 배치는 과거와 현대가 모호한 경계선을 그리며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옥스퍼드는 40개의 칼리지(단과대학)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13~16세기에 설립됐다. 우리가 옥스퍼드를 찾은 이유는 .. 2010. 5. 3.
[스위스] 쯔빙글리 Zwingli(1484-1531)  쯔빙글리 Zwingli(1484-1531) 오덕교 , 이상규 발췌,요약 1484년 스위스의 작은 도시 빌트하우스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쯔빙글리의 부모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특했던 쯔빙글리를 삼촌 바돌로뮤가 있던 베센으로 유학을 보내어 교육을 시켰다. 쯔빙글리는 10살까지 삼촌 집에 머물면서 공부하다가 먼 친척 뻘이 되는 뷘쯔리가 있던 바젤의 성 테오도어학교로 전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당시의 학제를 따라 3년간 라틴어,변증법,음악을 공부하였다. 쯔빙글리는 1496년 베른대학에 입학하여 하인리히 뵐프린 밑에서 고전과 음악을 공부하던 중 비엔나 대학으로 전학하였다. 그곳에서 스위스의 인문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요아킴 바디안을 만나 인문주의 사상을 배웠고,1502년에는 바젤대학으로 전학하여 토.. 2010. 5. 2.
[이탈리아] 프란체스코 ... 타락해 가는 교회에 '정화의 횃불'  ‘주여,나를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소서’라는 기도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으로 일컬어진다.그의 거룩한 성품과 복음을 철저히 따른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본받으려 했던 참 제자의 길이었다. 그의 영성은 십자가의 신비의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난과 가난을 자청했던 그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입은 상처가 자신의 몸에 그대로 나타나는 ‘성흔’을 받기까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뤘다. 프란체스코가 태어난 해가 1181년인지 1182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체스코(본명은 지오반니 디 베르난도네)는 젊은 시절에는 기사가 되길 꿈꾸며 인생을 즐겁게 보냈다. 하.. 2010. 5. 2.
[이탈리아] 토마스 아퀴나스 ... 이성과 계시 / 자연과 은혜의 조화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뛰어난 신학자를 뽑는다면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꼽힐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다. 그는 도미니쿠스 학파의 가장 뛰어난 학자였다.로마교회 신학의 기초를 완성한 인물이었으며 그가 세운 토마스학교(Thomistic School)는 21세기인 현재까지도 건재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들,‘존재와 본질에 관하여’‘자연의 원리에 관하여’ ‘센텐티아 주석’ 그리고 ‘신학총론’ 등은 그 양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그는 ‘교회의 박사’‘천사의 박사’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베네딕트 수도원 몬테카시노에서 수학한 후 나폴리에서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접했다.1244년 도미니코 교단에 들어가면서 그 이듬해 파리에서 알베르트 마구누스의.. 2010. 5. 2.
[영국] 존 웨슬리 ... '나눔의 신앙공동체'를 생활속으로  한국교회의 교회제도는 칼뱅의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가 지배해왔다. 그래서 감리교회나 성결교회,순복음교회도 모두 장로제도를 두고 있다. 감리교회마저도 담임목사를 감독과 감리사가 파송하는 게 아니라 교회 구역인사위원회의 3분의 2 찬성으로 초빙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웨슬리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한 신학은 자유주의도,근본주의도,신정통주의도 아닌 웨슬리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였다. 새벽기도회,철야기도회,속회나 구역예배,부흥회 등은 모두 웨슬리의 전통에서 나왔다. 한국의 성도들은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는 ‘마음의 종교(religion of heart)’를 선호하는 데 그것은 웨슬리에게서 나온 신앙 유형이다. 그 이유는 한국 최초의.. 2010. 5. 2.
[영국] 존 녹스 ... 영국 종교개혁 이끈 '변혁의 전도사' 맨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 영국과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신앙과 독립을 지켜낸 사람,그가 존 녹스이다.그가 땅에 눕혀질 때,당시 스코틀랜드의 섭정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 여기에 누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초기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1514년을 전후해서 태어났으리라는 것을 알 뿐이다.1540년에 그는 사제직에 있었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고위 당국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불러내어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게 하셨다.그가 언제 개혁 신앙으로 회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그러나 그가 조지 위셔트(George Wishart)와 관계를 맺으면서 큰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위셔트는 곳곳에서 개혁 신앙을 외쳤고 같은 생.. 2010. 5. 2.
[영국] 조지 뮐러 ... 고아 살핀 '65년간의 기도' ... 하늘의 응답 오늘의 성도들은 조지 뮐러라는 이름을 들으면 ‘5만번의 기도응답’‘영국 고아의 아버지’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는 수많은 예화의 주인공으로 오늘도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뮐러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한 신앙인일 뿐만 아니라 영국을 넘어 전세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초교파 공동체 운동인 ‘형제단’을 설립해 교회 개혁의 원형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뮐러가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주무대는 영국 브리스톨의 고아원이었다. 뮐러가 고아원을 시작한 데는 고아들에 대한 연민 이상의 결심이 있었다. 뮐러가 살았던 19세기 유럽은 인본주의 철학과 자유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신은 필요없다’는 자만이 팽배했다. 뮐러는 이런 불신앙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은 과거와 오逑構?지금도 역.. 2010. 5. 2.
[영국] 안셀무스 ... '알기 위해 믿어라' 이성적 외침 ‘하나님의 숙소’‘천국으로 가는 문’으로 불리는 영국 캔터베리 대성당은 성경의 이야기와 성자들의 삶을 그린 아름답고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하다. 6세기말 선교사 어거스틴이 영국 왕을 개종시키고 캔터베리에 대성당을 세워 그곳의 감독으로 활동하였다.2번의 화재로 초기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중세에 들어서서 지금의 고딕양식 건물이 완성되었다.영국의 교회사와 수명을 같이하고 있는 캔터베리 대성당은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 다음 가는 지위를 얻고 있다. 안셀무스는 바로 이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다.그는 신앙과 이성,초자연과 자연을 조화하려 했던 스콜라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이성으로서 설명하려고 감행하기도 전에 먼저 믿어버리고 나서는 우리가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 2010. 5. 2.
[체코]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1520년 루터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의 위협에 직면해 있을 때 루터를 지지하던 독일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꼭 100 년전 보헤미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교회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얀 후스가 화형(火刑)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얀 후스(Jan Hus)는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보헤미아 지역 출신이었다(1993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분리됐다). 보헤미아는 우리에게 조금 생소하게 들리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교향곡 ‘신세계’를 작곡한 안톤 드보르자크도 보헤미아 출신이다. 후스는 1372년께 보헤미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 2010. 4. 29.
[독일] 마르틴 루터 ... 신앙의 진리로 시대정신 일깨우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단순히 종교 개혁자로 알려져 왔다.그러나 루터와 서양사를 깊이 있게 관찰해 보면 그는 실로 근대 서구 문화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의 초기 노력은 확실성에 이르려는 것이었다.1505년 교회에서 벼락을 만나는 체험을 한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 진노의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서 중세 교회가 제시한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부정하게 된다.첫째로,그는 금식 철야 기도와 같은 종교적 행위를 통한 구원의 방법을 부정했다.그런 자기의 행위들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둘째로,루터는 고해의 성례에도 의지할 수 없었다.고해에는 참회·고백·사죄 선언·보상 등 네 과정이 있었다.루터는 이 고해의 과정들.. 2010. 4. 29.
[독일]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의 승리(1555년)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던 당시 독일에 군림하던 황제는 카를 5세였다. 그는 소년기를 막 벗어난 16세 때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약관 19세에 신성로마제국 즉,독일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인물이었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독일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으로 거대한 역사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때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혁신과 개혁의 시대를 이끌고 나갈 만한 역사적 통찰력이나 정치적 지도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는 루터 지지파와 가톨릭교회 지지파 사이에 끼여 우왕좌왕하다가 황제의 자리에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퇴위했다. 그후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다가 생애를 마친 불운한 인물이었다. 카를 5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곧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당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루터를 범죄.. 2010. 4. 29.
[독일] 루터의 결혼(1525년 6월 13일) 파란만장했던 루터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수녀 출신 카타리나 폰 보라 (Katharina von Bora)와의 결혼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사제이며 수도사였던 루터가 수녀원을 뛰쳐나온 수녀와 결혼한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루터는 본래 사제들이나 수녀들의 독신주의를 찬성하지 않았다. 루터는 줄곧 그들의 결혼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1523년 생선을 실어 나르는 포장마차 한 대가 먼 길을 달려 비텐베르크 성안으로 들어왔다. 마차의 포장을 들어올렸을 때 마차에는 생선이 들어있던 것이 아니라 9명의 수녀들이 숨어있었다. 수녀원을 탈출한 수녀들이었다. 이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수녀원을 빠져나와 루터를 찾아온 것이다. 루.. 2010. 4. 29.
[독일] 루터와 독일 농민봉기운동  1524년은 마르틴 루터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해였다. 그가 주도하던 교회개혁운동이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막 본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 남부 독일에서 예상치 못했던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이 뭉쳐서 귀족 영주 지주계급에 대항하는 항거운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항거의 깃발이 오르자 오랫동안 눌려 살아왔던 농민들은 속속 이들의 대열에 가담했고 곧장 대규모 농민봉기로 확산되었다. 이 농민운동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농민봉기 농민항쟁 농민반란 농민전쟁 등 다양하게 불리는 이 역사적 사건은 1년 남짓 계속되다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유럽 역사에서는 민중이 주동이 된 사회변혁 운동의 효시로 평가된다. 또한 종교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이 농민운동은 종교개혁의 방향과 전개 과정에 심.. 2010. 4. 29.
[독일] 마르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귀향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루터가 비텐베르크를 출발했다. 그때까지는 그가 주장했던 교회개혁은 신학적 이론 단계였을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개혁운동은 구체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가시적인 변화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독일 황제 앞에서도 그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10개월 동안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던 기간에 비텐베르크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루터가 없는 동안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충분한 준비나 계획 없이 성급히 교회개혁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운동의 중심 인물은 루터의 동료인 비텐베르크 대학의 카를슈타트(Karlstadt) 교수였다. 그는.. 2010. 4. 29.
[독일] 마르틴 루터의 '밧모섬' 시절 루터의 행방과 생사가 불확실해 뒤숭숭할 때 비텐베르크의 루터 친지들은 정체불명의 서신을 받아보게 된다. 극비로 전달된 서신을 받아본 친지들은 깜짝 놀랐다. 루터의 친필 편지였다. 발신지는 ‘나의 밧모섬으로부터’로 되어 있었다. 밧모섬이란 신약성경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이 유배되었던 섬이다. 루터는 있는 곳을 숨기고 함축적으로 밧모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루터가 죽지 않고 살아있구나!” 루터의 친지들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마음놓고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521년 4월 독일 남부 보름스에서 열렸던 어전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교회개혁에 관한 종래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독일 황제는 로마 교황청의 강요에 의해 루터를 독일제국의 ‘범죄자’로 정죄하는.. 2010. 4. 29.
[독일] '보름스의 황제칙령'과 마르틴 루터  1521년 신년초 마르틴 루터는 마침내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 당했다. 한편 이때를 전후해서 독일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1519년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 5세가 독일의 새로운 황제로 선출된 것이었다. 그가 독일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독일어도 할 줄 몰랐고 독일의 내부 사정에 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독일의 황제가 되자 보름스(Worms)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했다. 독일의 내부사정을 알 필요가 있었고 특히 당시 팽창일로에 있었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대책 마련 등 현안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1521년 1월말 황제의 도시 보름스에서 제국의회가 열렸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자 카를 5세로서는.. 2010. 4. 29.
[독일] 루터와 가톨릭 교회의 대결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 3:1∼2) 구약성경 전도서의 말씀대로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하나님은 역사의 때를 정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의 때가 이르도록 기다리시기도 한다. 가정해서 마르틴 루터가 그의 시대보다 100년전에 교회개혁 운동을 일으켰다면 그래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16세기 루터의 교회개혁 운동이 성공한 데는 여러 가지 역사적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성경을 비롯한 모든 책과 기록은 손으로 필사되었다. 필사본 시절 새로운 지식의 확산이나 정보의 전달은 극히.. 2010. 4. 29.
[독일] 십자군과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 판매  1517년 초엽 중부 독일지방에 뛰어난 웅변으로 명성을 떨치던 수도사 ‘테첼’(Tetzel)이 교황의 휘장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팔기 위해서였다. 특유의 언변으로 그가 쏟아내는 말들은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여러분 들으시오. 여러분의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연옥의 고통 중에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귀를 열고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를 낳아주었고 키워주었고 재산까지 남겨주었건만 너희는 우리를 이 고통받는 곳에서 구해주지 않는구나. 이 뜨거운 불꽃 속에 우리를 그대로 놔둘 셈이냐?’ 여러분은 고통 받는 그들의 영혼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찰랑하고 동전이 돈궤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고생하던 영혼.. 2010. 4. 29.
[독일] 폭풍속의 서원, 교회사 새장을 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모양과 방법으로 그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신다. 기도하는 조용한 골방에서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하고 지축을 흔드는 천둥과 번개로 그의 뜻을 전하시기도 한다. 1505년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중부 독일의 7월 어느 날. 대학생 차림의 젊은이가 연방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분주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명문 에르푸르트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한 이 젊은이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먼 길을 걸어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에르푸르트에 가까웠졌을 때 갑자기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날씨는 더욱 험악해지고 순식간에 어둠의 땅이 되어버렸다. 천둥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번쩍이는 칼날과 같은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사방으로 내려꽂혔다. 공포에 질린 청년은 .. 2010. 4. 29.
[이라크] 문명이 활짝핀 '천일야화의 고향' 바그다드  산천초목도 벌벌 떨 만큼 맹위를 떨치던 바빌로니아 제국이었으나 그 종말의 날은 너무도 빨리 왔다. 제국을 일으킨 느부갓네살 왕이 죽자(주전 562년)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제국의 운명은 급전직하로 기울어졌다. 느부갓네살이 죽은 지 23년만에 신흥세력 페르시아(바사)의 공격 앞에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한 채 힘없이 바빌로니아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써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역사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시대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주전 3000년대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지역에서 인류 최고(最古)의 수메르 문명이 일어난 이래 바빌로니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장구한 기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고대 근동세계에서 정치와 문화의 중심무대였다. 그곳에서 인류 최초의 문자(쐐기문자)가 만들어졌고,.. 2010. 4. 28.
[이라크] 메소포타미아의 제국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이라크 국토의 중심부를 비스듬히 흐르고 있는 두 개의 큰 강,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지역이다. 고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강 사이의 땅)라고 불려온 이 지역에 대부분 도시와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오늘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도 바로 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하고 기름진 천혜의 땅이다. 에덴동산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할 정도로 좋은 땅이다. 이곳에서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일어났고 이집트 인도 중국과 함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도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있었다. 우르는 오늘날 뉴스에 자주 언급되는 바스라와 나시리아 근처에 있었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역사는 아브라함이 고대 문명도시 우르를 떠나 황무한.. 2010. 4. 28.
[이라크]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이다. ‘갈대아’는 이라크의 남부지역을 지칭하며 ‘우르’는 그 지역에 있던 고대도시 이름이다. 지금부터 약 4000년전 이라크의 남부지역 ‘우르’에서 아브라함 가족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라크가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이 태어나고 자란 땅인 것이다. 이라크는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배가량 되는 크기의 땅이다. 이 땅의 중심부에는 2개의 큰 강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린다. 이 2개의 강은 이라크를 종단해 흐르다가 하류에는 합쳐져서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들어간다. 오른쪽의 강이 티그리스 강이고 왼쪽 것이 유프라테스 강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두 강 사이의 지역을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렀고 지금도 그 지명이 쓰이고 있.. 2010.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