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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51

[영국] 존 웨슬리 ... '나눔의 신앙공동체'를 생활속으로  한국교회의 교회제도는 칼뱅의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가 지배해왔다. 그래서 감리교회나 성결교회,순복음교회도 모두 장로제도를 두고 있다. 감리교회마저도 담임목사를 감독과 감리사가 파송하는 게 아니라 교회 구역인사위원회의 3분의 2 찬성으로 초빙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웨슬리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한 신학은 자유주의도,근본주의도,신정통주의도 아닌 웨슬리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였다. 새벽기도회,철야기도회,속회나 구역예배,부흥회 등은 모두 웨슬리의 전통에서 나왔다. 한국의 성도들은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는 ‘마음의 종교(religion of heart)’를 선호하는 데 그것은 웨슬리에게서 나온 신앙 유형이다. 그 이유는 한국 최초의.. 2010. 5. 2.
[영국] 존 녹스 ... 영국 종교개혁 이끈 '변혁의 전도사' 맨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 영국과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신앙과 독립을 지켜낸 사람,그가 존 녹스이다.그가 땅에 눕혀질 때,당시 스코틀랜드의 섭정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 여기에 누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초기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1514년을 전후해서 태어났으리라는 것을 알 뿐이다.1540년에 그는 사제직에 있었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고위 당국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불러내어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게 하셨다.그가 언제 개혁 신앙으로 회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그러나 그가 조지 위셔트(George Wishart)와 관계를 맺으면서 큰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위셔트는 곳곳에서 개혁 신앙을 외쳤고 같은 생.. 2010. 5. 2.
[영국] 조지 뮐러 ... 고아 살핀 '65년간의 기도' ... 하늘의 응답 오늘의 성도들은 조지 뮐러라는 이름을 들으면 ‘5만번의 기도응답’‘영국 고아의 아버지’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는 수많은 예화의 주인공으로 오늘도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뮐러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한 신앙인일 뿐만 아니라 영국을 넘어 전세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초교파 공동체 운동인 ‘형제단’을 설립해 교회 개혁의 원형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뮐러가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주무대는 영국 브리스톨의 고아원이었다. 뮐러가 고아원을 시작한 데는 고아들에 대한 연민 이상의 결심이 있었다. 뮐러가 살았던 19세기 유럽은 인본주의 철학과 자유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신은 필요없다’는 자만이 팽배했다. 뮐러는 이런 불신앙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은 과거와 오逑構?지금도 역.. 2010. 5. 2.
[영국] 안셀무스 ... '알기 위해 믿어라' 이성적 외침 ‘하나님의 숙소’‘천국으로 가는 문’으로 불리는 영국 캔터베리 대성당은 성경의 이야기와 성자들의 삶을 그린 아름답고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하다. 6세기말 선교사 어거스틴이 영국 왕을 개종시키고 캔터베리에 대성당을 세워 그곳의 감독으로 활동하였다.2번의 화재로 초기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중세에 들어서서 지금의 고딕양식 건물이 완성되었다.영국의 교회사와 수명을 같이하고 있는 캔터베리 대성당은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 다음 가는 지위를 얻고 있다. 안셀무스는 바로 이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다.그는 신앙과 이성,초자연과 자연을 조화하려 했던 스콜라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이성으로서 설명하려고 감행하기도 전에 먼저 믿어버리고 나서는 우리가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 2010. 5. 2.
[체코]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1520년 루터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의 위협에 직면해 있을 때 루터를 지지하던 독일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꼭 100 년전 보헤미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교회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얀 후스가 화형(火刑)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얀 후스(Jan Hus)는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보헤미아 지역 출신이었다(1993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분리됐다). 보헤미아는 우리에게 조금 생소하게 들리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교향곡 ‘신세계’를 작곡한 안톤 드보르자크도 보헤미아 출신이다. 후스는 1372년께 보헤미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 2010. 4. 29.
[독일] 마르틴 루터 ... 신앙의 진리로 시대정신 일깨우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단순히 종교 개혁자로 알려져 왔다.그러나 루터와 서양사를 깊이 있게 관찰해 보면 그는 실로 근대 서구 문화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의 초기 노력은 확실성에 이르려는 것이었다.1505년 교회에서 벼락을 만나는 체험을 한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 진노의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서 중세 교회가 제시한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부정하게 된다.첫째로,그는 금식 철야 기도와 같은 종교적 행위를 통한 구원의 방법을 부정했다.그런 자기의 행위들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둘째로,루터는 고해의 성례에도 의지할 수 없었다.고해에는 참회·고백·사죄 선언·보상 등 네 과정이 있었다.루터는 이 고해의 과정들.. 2010. 4. 29.
[독일]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의 승리(1555년)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던 당시 독일에 군림하던 황제는 카를 5세였다. 그는 소년기를 막 벗어난 16세 때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약관 19세에 신성로마제국 즉,독일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인물이었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독일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으로 거대한 역사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때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혁신과 개혁의 시대를 이끌고 나갈 만한 역사적 통찰력이나 정치적 지도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는 루터 지지파와 가톨릭교회 지지파 사이에 끼여 우왕좌왕하다가 황제의 자리에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퇴위했다. 그후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다가 생애를 마친 불운한 인물이었다. 카를 5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곧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당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루터를 범죄.. 2010. 4. 29.
[독일] 루터의 결혼(1525년 6월 13일) 파란만장했던 루터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수녀 출신 카타리나 폰 보라 (Katharina von Bora)와의 결혼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사제이며 수도사였던 루터가 수녀원을 뛰쳐나온 수녀와 결혼한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루터는 본래 사제들이나 수녀들의 독신주의를 찬성하지 않았다. 루터는 줄곧 그들의 결혼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1523년 생선을 실어 나르는 포장마차 한 대가 먼 길을 달려 비텐베르크 성안으로 들어왔다. 마차의 포장을 들어올렸을 때 마차에는 생선이 들어있던 것이 아니라 9명의 수녀들이 숨어있었다. 수녀원을 탈출한 수녀들이었다. 이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수녀원을 빠져나와 루터를 찾아온 것이다. 루.. 2010. 4. 29.
[독일] 루터와 독일 농민봉기운동  1524년은 마르틴 루터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해였다. 그가 주도하던 교회개혁운동이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막 본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 남부 독일에서 예상치 못했던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이 뭉쳐서 귀족 영주 지주계급에 대항하는 항거운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항거의 깃발이 오르자 오랫동안 눌려 살아왔던 농민들은 속속 이들의 대열에 가담했고 곧장 대규모 농민봉기로 확산되었다. 이 농민운동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농민봉기 농민항쟁 농민반란 농민전쟁 등 다양하게 불리는 이 역사적 사건은 1년 남짓 계속되다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유럽 역사에서는 민중이 주동이 된 사회변혁 운동의 효시로 평가된다. 또한 종교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이 농민운동은 종교개혁의 방향과 전개 과정에 심.. 2010. 4. 29.
[독일] 마르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귀향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루터가 비텐베르크를 출발했다. 그때까지는 그가 주장했던 교회개혁은 신학적 이론 단계였을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개혁운동은 구체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가시적인 변화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독일 황제 앞에서도 그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10개월 동안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던 기간에 비텐베르크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루터가 없는 동안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충분한 준비나 계획 없이 성급히 교회개혁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운동의 중심 인물은 루터의 동료인 비텐베르크 대학의 카를슈타트(Karlstadt) 교수였다. 그는.. 2010. 4. 29.
[독일] 마르틴 루터의 '밧모섬' 시절 루터의 행방과 생사가 불확실해 뒤숭숭할 때 비텐베르크의 루터 친지들은 정체불명의 서신을 받아보게 된다. 극비로 전달된 서신을 받아본 친지들은 깜짝 놀랐다. 루터의 친필 편지였다. 발신지는 ‘나의 밧모섬으로부터’로 되어 있었다. 밧모섬이란 신약성경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이 유배되었던 섬이다. 루터는 있는 곳을 숨기고 함축적으로 밧모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루터가 죽지 않고 살아있구나!” 루터의 친지들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마음놓고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521년 4월 독일 남부 보름스에서 열렸던 어전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교회개혁에 관한 종래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독일 황제는 로마 교황청의 강요에 의해 루터를 독일제국의 ‘범죄자’로 정죄하는.. 2010. 4. 29.
[독일] '보름스의 황제칙령'과 마르틴 루터  1521년 신년초 마르틴 루터는 마침내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 당했다. 한편 이때를 전후해서 독일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1519년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 5세가 독일의 새로운 황제로 선출된 것이었다. 그가 독일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독일어도 할 줄 몰랐고 독일의 내부 사정에 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독일의 황제가 되자 보름스(Worms)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했다. 독일의 내부사정을 알 필요가 있었고 특히 당시 팽창일로에 있었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대책 마련 등 현안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1521년 1월말 황제의 도시 보름스에서 제국의회가 열렸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자 카를 5세로서는.. 2010.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