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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51

혁명적 신학자 토마스 뮌처 농민 편에 선 개혁가 “영주 비위 맞추는 루터, 또다른 교황일 뿐…” 맹비난 “당신이 제후들을 책망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오. 당신은 다시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소. 당신은 새로운 교황으로 그들에게 수도원들과 교회들을 선물로 주고 있소. 그래서 그들은 당신에게 만족하는 것이오.” 루터를 새로운 교황으로 비난하는 이 글은 시의회가 칼슈타트(1480∼1541)의 글을 압수하기 위해 인쇄소를 뒤질 때 함께 발견된 것이다. 칼슈타트는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로 루터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선배교수였다. 그는 루터가 바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을 때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계급적인 교회제도를 배척하고 사회적 평등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는 복장 착용을 반대해 .. 2011. 12. 20.
냉혹한 열정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  박해받는 신교도 위해 ‘기독교 강요’ 저술… 유럽 역사를 새로 쓰다 “쾅, 쾅, 쾅.” 누군가 문을 부술 모양으로 두들겼다. “빨리 문을 열라.” 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방문은 아직 잠겨 있다. 그렇지만 곧 열릴 것이다. 도망갈 수 있는 길은 창문 아래 정원 쪽이었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정원은 한참 아래에 있었다. 이미 문이 덜컹대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청년은 커튼을 꼬아 정원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정원 쪽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가까스로 정원으로 내려와 도주에 성공했다. 커튼을 타고 내려와 도주에 성공한 이 청년은 얼마 전 파리 대학 학장이 행한 연설의 실제 작성자로 의심받고 있었다. 이 청년의 친구인 파리대학 학장 니콜라 콥은 1533년 11월 1일 만성절에 관.. 2011. 11. 22.
독일의 스승 필립 멜랑히톤 21살에 교수 된 천재, 날카로운 글로 루터의 개혁을 돕다 1518년 11월 22일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초조하게 심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뒤 심문을 받기 위해 로마 교황청 아우구스부르크로 소환되어 와 있었던 것이다. 초조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어린 교수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루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나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아 죽는다면, 후회는 없다네. 그러나 그대와의 말 할 수 없이 달콤한 교제가 중단되는 것은 가장 견디기 어렵다네.” 루터가 죽음보다 관계가 끊어질까 더 두려워했던 이 젊은 교수는 누구일까? 그 교수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 부임한 지 얼마 안되는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 2011. 10. 18.
종교개혁 알을 낳은 에라스무스 예수님이 바보?… 세상 진짜 바보에 대한 조롱이었다 “예수는 바보다.” 르네상스 시대에 종교권력이 아무리 부패하고 쇠퇴했다 할지라도, 아직도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시대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단칼에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그런 시대에 이런 신성모독적인 주장을 하다니? 이런 주장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주장을 하려면, 목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 에라스무스(1466 또는 1469∼1536년)였다. 그는 풍자적이고 익살맞은 문체로 ‘우신예찬’을 써서 예수가 바보라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했다. 우신예찬에는 인간의 순수한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바보신, 즉 우신(Moria)이 등장한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의 입을 통해 당대 종교지도자와 권력자 그리고 지식인들을 재.. 2011. 10. 11.
[서울신문]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백조를 예언하고 죽은 거위…종교개혁의 서막  “진실 수호” 600년 전 얀 후스의 마지막 외침 부패한 종교에 저항의 싹 틔우다  1415년 7월 16일은 토요일이었다. 초여름 보헤미아 왕국(지금의 헝가리)의 동은 일찍 텄다. 오전 6시 미사를 시작으로 콘스탄스 회의는 얀 후스(1372~1415)를 ‘참으로 실제적이고, 공개적인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악마가 그려진 모자를 씌우고 목까지 쌓아올린 장작더미 속에서 화형시켰다. 성직자들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의 사기성을 비판하면서 로마 교황의 눈엣가시가 된, 체코 출신의 신학자이자 설교가인 후스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죽음 뒤 체코 백성들은 사제들과 대주교의 집을 공격하며 민중의 이름으로 콘스탄스 회의를 정죄했다. 200년에 걸친 종교 개혁.. 2011. 4. 1.
[동아일보] 종교개혁 발상지를 가다 1. 루터와 비텐베르크城 교회 《1517년 교황의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발표하면서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마르틴 루터. 그 종교개혁의 정신이 면면히 흘러온 지 약 500년. 그러나 한국의 종교계는 소란스러움이 그치지 않고 있다. 루터의 독일, 장 칼뱅의 스위스 등 종교개혁의 정신이 남아 있는 유럽을 찾아 종교의 근본정신을 되짚어보는 기사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5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옛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에서 차량으로 1시간 남짓 떨어진 이곳은 종교개혁의 대명사 마르틴 루터(1483∼1546)로 기억되는 도시다. 쌀쌀한 날씨 속에 교회 앞에 있던 서너 명이 검은색 동판을 가리키며 다소 들뜬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기독교를, 나아가 세계사를 바꾼 것으로 평가받는 루터의 95개.. 2011. 3. 22.
[서울경제] 유럽 종교개혁 그 성지를 가다. "면죄부 팔지말라" 외친 교회 해마다 20만명 순례객 발길 "오직 믿음뿐… 성경 본질로" '95개조 명제' 동판문 각인 종교개혁 500주년 앞둔 오늘날 교회·신앙인에 교훈 비텐베르크·아이제나흐·아이스레벤· 브룸스(독일)=조상인기자 ccsi@sed.co.kr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사제이자 신학자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당시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 등 문제점을 지적한 '95개조 명제'를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문에 붙였다. 교황청은 진노했고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유럽 전역으로 '사건'은 번져갔다.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오는 2017년이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다. 이 특별한 해를 기념하기 위해 종교개혁 관련 지역들은 2008년 9월부터 '10년 준비 사업'에 착수했다. .. 2011. 3. 16.
[문화일보] 유럽 종교개혁 성지를 가다. “진리를 들으라, 수호하라” 목숨 건 외침 들리는 듯 (上) 체코 프라하-얀 후스 2017년은 루터가 1517년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발표하며 종교 개혁의 불을 댕긴 지 500년이 되는 해여서 개신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개신교계도 교회의 세속화, 물질주의 등으로 비판받고 있는 최근의 상황을 되돌아보며 성찰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교황의 면죄부를 비판하다 화형당한 얀 후스의 정신이 서린 체코 프라하와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마르틴 루터의 유적지가 있는 독일 비텐베르크 등 체코, 독일, 스위스의 종교개혁 현장 탐방기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종교개혁의 기운, 루터 100년 전에 체코 프라하에 있었다. 유럽 개신교계는 최근 대표적 종교 개혁가인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 2011. 3. 14.
[연합뉴스] 유럽 종교개혁지 탐방. 루터의 흔적을 따라서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은 '오직 믿음'으로 되돌아가는것" (비텐베르크.아이제나흐.보름스=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관광객들로 늘 북적이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 대부분의 관광객은 매시 정각 인형이 움직이는 시청사의 천문시계를 보려고 이곳을 찾지만 이곳 광장에는 개신교도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동상이 있다. 광장 한가운데 자리잡은 이 동상은 면죄부 판매 등을 비판하다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을 당한 체코의 종교 개혁가 얀 후스(1369~1415)의 순교 5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것이다. 체코어로 '거위'라는 의미의 후스는 죽을 당시 "지금 당신들은 거위 한 마리를 죽이는 것이지만 100년 후 백조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 같은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100년 후 독일에 마.. 2011. 3. 9.
[체코] 프라하 Czech: Praha 동유럽국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인 프라하(Praha)는 유럽에서도 가장 중요한 여행지로 꼽히는데, 첨탑의 도시 프라하를 두고 건축박물관이라고도 말한다. 프라하는 역동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중요한 변화의 심장부다. 40년 이상을 통치했던 공산주의 정권이 몰락했을 때 이곳 프라하는 그 긴 역사(1000년)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로 자리를 잡은 9세기 말부터 1000년 이상이 지난 현재까지도 프라하는 중세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몰다우(블타바) 강을 끼고 프라하 성과 맞은 편으로 펼쳐진 구시가지의 대비, 아름다운 푸른 녹지와 역사적인 문화재로 가득찬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여 ‘제 2의 파리’ 또는 ‘북쪽의 로마’로 불리기도 한다. 11~13세기의 로마네.. 2010. 9. 5.
[독일] 프랑크푸르트 1400여년의 역사를 가졌고 중세시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선출이나 대관식 등 중요의식이 거행되어 왔던 프랑크푸르트(Frankfurt)는 2차대전 말 연합국의 폭격으로 수 많은 문화재와 역사적인 건축물 등 전 시가의 70% 이상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전후복구를 통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재건되었으므로 폭격에서 살아남은, 고딕식으로부터 바로크, 로코코식의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표상되는 중세봉건시대와 초고층 인공지능 빌딩들이 대변하는 현대사회가 공존하는 듯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프랑크푸르트가 처음 언급된 것은 794년, 칼대제(카로링거왕조)가 의회와 종교회의에서 „프랑코노푸르드(Franconofurd)“로 일컬었던 것으로 이 후, 연례 왕정회의를 하여 조그마한 한 촌락이 중요한 도시로 발돋음하게 되었다. 13.. 2010. 5. 9.
[독일] 보름스 Worms 보름스(Worms)는 독일의 가장 오래된 도시중의 하나로 많은 건축물과 동상 등으로 독일역사의 기나긴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현재의 보름스는 라인강변의 현대적인 도시로 변화되었으며 현재와 과거 즉, 니벨룽의 전설과 1000년의 세월을 견뎌온 교회들, 신성로마제국의 수 많은 회의가 열렸고, 종교개혁자 마틴루터가 자신의 종교적신념을 강변한 장소 카이저돔 등과 함께 공존하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보름스의 역사는 기원전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기원전 후 로마군이 점령하여 요새화 되었었고 435년 주민들이 로마 총독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Flavius Aetius)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부르군더의 본거지가 되자 아이티우스는 훈족 군대를 동원하여 도시를 파괴하였다. 이러한 훈족으로 멸망한 부르군더왕국의 .. 2010.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