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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grim Story/유럽192

[한겨레신문] 유럽 종교개혁 성지를 찾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린 ‘죄’ 500년 증거 루터가 심은 생명의 사과나무 돈 받고 파는 교권의 면죄부 맞서 ‘예수뜻 회복’ 화형으로도 태우지 못한 ‘성서 진리’ 깊은 뿌리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 500돌(2017년)이 6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교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 돌아가고자 했던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리려는 한국교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얼굴로 꼽히는 대형교회들로부터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비리와 싸움, 개신교 최대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돈선거’ 등으로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 거세지며 ‘종교개혁 정신’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때마침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츠빙글리 등 개혁가들의 흔적을 찾아나선 경기도 용인 죽전 새에덴교회(.. 2014. 9. 16.
[독일] 비텐베르그 비텐베르그(Lutherstadt Wittenberg)는 Sachen-Anhalt 주의 엘베(Elbe)강가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Unesco가 1996년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도시이다. 비텐베르그는 특히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의 진원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16세기 유럽의 종교적, 문화적 요충지가 되었다. 마틴루터 이외에도 멜랑흐톤(Phillipp Melanchthon),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 요나스(Justus Jonas), 독일 르네상스의 유명한 화가 크라나흐(Cranach)등이 활동하던 도시이기도 하다. 마틴루터의 집은 1504~1507에 원래 아우구스티너수도승들을 위해 지어졌는데 마틴루터가 1508년부터 이 곳에 살며 일했으며 부인 카타리나와 1525년에.. 2014. 9. 16.
[독일] 꺼지지 않는 등불 ... 루터의 가르침과 개혁정신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할 때 예배 선교 봉사와 함께 중요하게 손꼽히는 것이 교회교육이다. 오늘날 교회의 교육적 사명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그랬던 것이 아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회교육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은 마르틴 루터가 이룩한 또 하나의 공헌이었다. 1520년대말 루터는 그가 살던 작센주의 여러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교회 순방을 하는 동안 루터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이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매우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십계명이나 사도신경을 모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주기도문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모든 크리스천이 성직자들과 동등하다는 ‘만인제사장’을 주장했던 루터.. 2014. 9. 16.
[독일] 마르틴 루터의 출생과 성장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아니면 영웅이 새 시대를 만들어 나가는가? 끊임없이 회자되는 역사논쟁의 화두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은 둘 다 아니라고 대답한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고 고백한다.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오만방자한 자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시고,시대에 따라 역사의 주역을 감당할 인물을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신다고 믿는다.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 모세 다윗 바울 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 쓰신 역사의 주역들이었다. 16세기초 하나님은 또 한 사람의 역사의 주역을 부르셨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2000년 교회 역사의 .. 2014. 9. 16.
[독일] 아이슬레벤 & 만스펠트 아이슬레벤(Lutherstadt Eisleben)은 종교개혁자 마틴루터가 태어난 도시이며 또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 도시이기도 하다. 아이슬레벤은 중세기 유럽에서 가장 유명했던 광산 및 구리(Kupferschieferbergbau)공업도시 중 하나인데 구시가는 역사적인 건물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모두 도시민들의 도시사랑으로 재건한 것 들이다. 마틴루터의 생가는 현 루터거리에 있는데 이곳에서 마틴루터가 1483년 11월 10일 태어났다. 이 생가는 오랫동안 아이슬레벤 시민들이 보호하고 가꾸어 왔으나 1689년의 대 화재 후 파손, 다시 재건되었다. 길가 쪽 면은 바로크풍이다. 생가에서 조금 가다보면 마틴루터가 세례를 받은 성베드로-바울교회(St. Petri-Pauli Kirche)가 있으며 이 르네상스.. 2014. 9. 16.
[이탈리아] 폼페이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灣) 연안에 있던 고대도시. 지금은 내륙(內陸)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江)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 ·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제정(帝政)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 ·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폼페이의 기원은 매우 오래 되었으며, 처음에는 오스키인(人)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BC 470∼BC 424년경에는 에트루리아인(人)이 차지하였고, 그 뒤 BC 80년까지는 삼니트인들이 도시를 지배하였다. 그동안 남부 이탈리아에 많은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한 그리스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특히 BC 3세기 중반부터는 헬레.. 2014. 7. 30.
[이탈리아] 보디올, 레기온, 수리구사... 마지막항구 바울을 압송하여 로마로 항해하던 알렉산드리아 배는 풍랑을 만나 14일만에 난파된 채 멜리데(몰타)섬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곳 추장 보블리오의 대접을 받은 후 다시 배로 오늘날 시칠리아 섬의 수라구사(Syracuse)에 도착하여 다시 레기온과 보디올을 거쳐 육지로 올라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향했다(행 27:27,28:1∼14). 그 여정 중 나는 로마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바울의 압송 경로 반대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로마를 떠나 잘 닦여진 도로를 따라 남쪽에 있는 보디올로 향했다. 보디올(Putheoli)은 오늘날 포추올리(Pozzuoli)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어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보디올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다. 그리스 사모스 섬 출신의 이주민들에 의해 세.. 2014. 7. 30.
[이탈리아] 로마 바울참수터 (=세분수수도원) 기원 후 68년(추정) 로마의 5번째 황제 네로시절 로마에서 순교한 사도 바울의 참수터에 세워진교회가 세분수 교회입니다. 이태리어로는 Tre Fontane(뜨레 폰타네)인데 이는 바울의 목을 대리석 기둥으로된 단두대에서 참수하였을때 기울어진 지형탓에 그의 목이 땅에 세번을 튀어 떨어졌는데 그의 목이 닿은 땅에서 즉시 물이 솟아 낫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금도 그 단두대는 온전히 보관되어 있고 목이 떨어져 물이 솟았던 자리에는 표식이 있습니다. 현재 세워진 교회는 여러번 개축 하여 1599년에 지어졌습니다. 2014. 7. 30.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박물관 神의 대리인 바티칸 시국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로마’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기로 돈을 버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에 살면서 문화강국을 이루었던 팍스 로마나의 시대에 대한 동경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또 전 세계인들이 평화를 갈구할 때 먼저 바라보는 곳이 이곳 로마 바티칸이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박물관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떼르미니 기차역에 내리는 순간, 이미 로마라는 박물관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 로마의 중심에 있는 신의 도시 바티칸 시국으로 가려면 테르미니 역에서 64번 버스를 탄다. 제국의 후예들이 소매치기로 활동하기로 유명한 버스다. 일행 중 한명은 가방을, 다른 한명은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로마의 소매치.. 2014. 7. 30.
[독일] 가톨릭 교회를 향한 루터의 결별선언과 파문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고 역사의 방향도 새롭게 전개될 수 있다. 1520년은 마르틴 루터에게는 위기의 시간이었다. 로마 교황은 그에게 교서를 보내서 60일 이내에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명령했다. 교황청으로서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신부이며 수도사였던 루터에게 베푸는 마지막 ‘관용의 기회’였다. 이를 거부할 경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문뿐이었다. 파문은 그를 이단자로 낙인 찍어 교회 밖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중세 가톨릭 교회는 이단자에게는 화형의 형벌도 불사했다. 이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루터로서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운명의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의외로 담담했고 담대했다. 그는 진리가 승리할 것을 확신했고 ‘강한 성(城)’.. 2014. 7. 2.
[독일]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 종교개혁주일을 앞두고 한국 신학계의 태두인 박준서 박사의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를 연재합니다. 내주부터 매주 화요일 35면에서 박 교수의 해박한 신학과 현장의 숨소리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1517년 늦가을. 독일 엘베 강가의 조용한 대학도시 비텐베르크의 아침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우유배달 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른 아침의 정적을 깨뜨리는 사이 검고 긴 사제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어디론가 분주히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단단한 체구의 젊은이의 손에는 둘둘 말린 큰 종이뭉치가 쥐어져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투지와 긴장감이 배어났다. 젊은이가 도착한 곳은 비텐베르크대학에서 교회로 사용하고 있는 대학교회의 정문이었다. 원래 이 교회는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성채에 부속된 ‘성채교회’(Ca.. 2014. 7. 2.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의 정신 루터가 외쳤다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오!” 2017년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비텐베르크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논제’라는 제목의 문서를 걸어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개신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세상으로부터 모욕을 받고 있는 이 시점에 초기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새겨 보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500년 전에 타락한 종교 현실을 목격하고 그러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루터가 기독교인에게 요구했던 기독교인의 정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신부가 수녀와 결혼하다니!”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게다가 신랑은 42세였고, 신부는 신랑보다 16세나 어렸다. 신랑이 ‘도둑놈’ 소리를 들을 정도의 나이차였다... 2014.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