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서19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예루살렘의 성전산 문제는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인 다윗 왕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구약시대 유다지파에 속하는 무명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냈다. 그는 베들레헴의 목동 출신으로 이스라엘 왕의 자리까지 오른 다윗 왕이었다. 다윗은 천부적인 군사지도자였다. 양을 치던 목동 시절에 이미 블레셋족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매 돌 하나로 거꾸러뜨린 무용담을 남기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첫째 왕 사울이 블레셋족과 싸우다 전사한 후 다윗은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무장으로서 재능을 십분 발휘하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는 주변 나라들을 모두 정복하여 이스라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모든 것을 다.. 2015. 7. 7. [독일] 꺼지지 않는 등불 ... 루터의 가르침과 개혁정신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할 때 예배 선교 봉사와 함께 중요하게 손꼽히는 것이 교회교육이다. 오늘날 교회의 교육적 사명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그랬던 것이 아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회교육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은 마르틴 루터가 이룩한 또 하나의 공헌이었다. 1520년대말 루터는 그가 살던 작센주의 여러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교회 순방을 하는 동안 루터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이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매우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십계명이나 사도신경을 모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주기도문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모든 크리스천이 성직자들과 동등하다는 ‘만인제사장’을 주장했던 루터.. 2014. 9. 16. [독일] 마르틴 루터의 출생과 성장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아니면 영웅이 새 시대를 만들어 나가는가? 끊임없이 회자되는 역사논쟁의 화두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은 둘 다 아니라고 대답한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고 고백한다.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오만방자한 자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시고,시대에 따라 역사의 주역을 감당할 인물을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신다고 믿는다.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 모세 다윗 바울 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 쓰신 역사의 주역들이었다. 16세기초 하나님은 또 한 사람의 역사의 주역을 부르셨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2000년 교회 역사의 .. 2014. 9. 16. [독일] 가톨릭 교회를 향한 루터의 결별선언과 파문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고 역사의 방향도 새롭게 전개될 수 있다. 1520년은 마르틴 루터에게는 위기의 시간이었다. 로마 교황은 그에게 교서를 보내서 60일 이내에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명령했다. 교황청으로서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신부이며 수도사였던 루터에게 베푸는 마지막 ‘관용의 기회’였다. 이를 거부할 경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문뿐이었다. 파문은 그를 이단자로 낙인 찍어 교회 밖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중세 가톨릭 교회는 이단자에게는 화형의 형벌도 불사했다. 이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루터로서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운명의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의외로 담담했고 담대했다. 그는 진리가 승리할 것을 확신했고 ‘강한 성(城)’.. 2014. 7. 2. [독일]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 종교개혁주일을 앞두고 한국 신학계의 태두인 박준서 박사의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를 연재합니다. 내주부터 매주 화요일 35면에서 박 교수의 해박한 신학과 현장의 숨소리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1517년 늦가을. 독일 엘베 강가의 조용한 대학도시 비텐베르크의 아침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우유배달 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른 아침의 정적을 깨뜨리는 사이 검고 긴 사제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어디론가 분주히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단단한 체구의 젊은이의 손에는 둘둘 말린 큰 종이뭉치가 쥐어져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투지와 긴장감이 배어났다. 젊은이가 도착한 곳은 비텐베르크대학에서 교회로 사용하고 있는 대학교회의 정문이었다. 원래 이 교회는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성채에 부속된 ‘성채교회’(Ca.. 2014. 7. 2. [이스라엘] 성전산 오늘날 지구상에서 3차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은 어디일까? 국제문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스라엘이다.전세계 19억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고향인 성지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것은 놀랍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도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더욱 위험한 곳이며 예루살렘에서도 ‘성전산(聖殿山)’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성전산’이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위험한 곳인가? 성전산이라는 명칭은 예루살렘에서 지형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성전을 세운 데서 연유한다.본래 예루살렘은 해발 750m 지점 유다 산악지역에 위치했던 난공불락의 천연적 요새였다.주전 1000년께 베들레헴의 목동 출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 2010. 7. 11. [체코]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1520년 루터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의 위협에 직면해 있을 때 루터를 지지하던 독일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꼭 100 년전 보헤미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교회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얀 후스가 화형(火刑)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얀 후스(Jan Hus)는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보헤미아 지역 출신이었다(1993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분리됐다). 보헤미아는 우리에게 조금 생소하게 들리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교향곡 ‘신세계’를 작곡한 안톤 드보르자크도 보헤미아 출신이다. 후스는 1372년께 보헤미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 2010. 4. 29. [독일]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의 승리(1555년)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던 당시 독일에 군림하던 황제는 카를 5세였다. 그는 소년기를 막 벗어난 16세 때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약관 19세에 신성로마제국 즉,독일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인물이었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독일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으로 거대한 역사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때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혁신과 개혁의 시대를 이끌고 나갈 만한 역사적 통찰력이나 정치적 지도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는 루터 지지파와 가톨릭교회 지지파 사이에 끼여 우왕좌왕하다가 황제의 자리에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퇴위했다. 그후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다가 생애를 마친 불운한 인물이었다. 카를 5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곧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당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루터를 범죄.. 2010. 4. 29. [독일] 루터의 결혼(1525년 6월 13일) 파란만장했던 루터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수녀 출신 카타리나 폰 보라 (Katharina von Bora)와의 결혼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사제이며 수도사였던 루터가 수녀원을 뛰쳐나온 수녀와 결혼한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루터는 본래 사제들이나 수녀들의 독신주의를 찬성하지 않았다. 루터는 줄곧 그들의 결혼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1523년 생선을 실어 나르는 포장마차 한 대가 먼 길을 달려 비텐베르크 성안으로 들어왔다. 마차의 포장을 들어올렸을 때 마차에는 생선이 들어있던 것이 아니라 9명의 수녀들이 숨어있었다. 수녀원을 탈출한 수녀들이었다. 이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수녀원을 빠져나와 루터를 찾아온 것이다. 루.. 2010. 4. 29. [독일] 루터와 독일 농민봉기운동 1524년은 마르틴 루터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해였다. 그가 주도하던 교회개혁운동이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막 본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 남부 독일에서 예상치 못했던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이 뭉쳐서 귀족 영주 지주계급에 대항하는 항거운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항거의 깃발이 오르자 오랫동안 눌려 살아왔던 농민들은 속속 이들의 대열에 가담했고 곧장 대규모 농민봉기로 확산되었다. 이 농민운동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농민봉기 농민항쟁 농민반란 농민전쟁 등 다양하게 불리는 이 역사적 사건은 1년 남짓 계속되다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유럽 역사에서는 민중이 주동이 된 사회변혁 운동의 효시로 평가된다. 또한 종교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이 농민운동은 종교개혁의 방향과 전개 과정에 심.. 2010. 4. 29. [독일] 마르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귀향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루터가 비텐베르크를 출발했다. 그때까지는 그가 주장했던 교회개혁은 신학적 이론 단계였을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개혁운동은 구체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가시적인 변화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독일 황제 앞에서도 그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10개월 동안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던 기간에 비텐베르크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루터가 없는 동안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충분한 준비나 계획 없이 성급히 교회개혁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운동의 중심 인물은 루터의 동료인 비텐베르크 대학의 카를슈타트(Karlstadt) 교수였다. 그는.. 2010. 4. 29. [독일] 마르틴 루터의 '밧모섬' 시절 루터의 행방과 생사가 불확실해 뒤숭숭할 때 비텐베르크의 루터 친지들은 정체불명의 서신을 받아보게 된다. 극비로 전달된 서신을 받아본 친지들은 깜짝 놀랐다. 루터의 친필 편지였다. 발신지는 ‘나의 밧모섬으로부터’로 되어 있었다. 밧모섬이란 신약성경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이 유배되었던 섬이다. 루터는 있는 곳을 숨기고 함축적으로 밧모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루터가 죽지 않고 살아있구나!” 루터의 친지들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마음놓고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521년 4월 독일 남부 보름스에서 열렸던 어전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교회개혁에 관한 종래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독일 황제는 로마 교황청의 강요에 의해 루터를 독일제국의 ‘범죄자’로 정죄하는.. 2010. 4. 29. 이전 1 2 다음